일흔세 번째
평창에서 만난 우(牛)정
화창한 봄, 시원한 바람을 타고 스누새는 오랜만에 장거리 비행을 다녀왔어요. 예쁜 튤립이 가득 피어난 평창캠퍼스로요! 지난 방문 때 옥수수를 나눠주었던 소, 닭 친구를 다시 만나 안부를 나누고 처음 만난 알파카, 산양, 송아지와도 인사했습니다.
평창캠퍼스에서 만난 소, 튤립, 알파카
평창캠퍼스에서 만난 소, 튤립, 알파카
“선생님, 이 친구가 여물을 뱉어내네요. 확인해 주세요.”

곳곳을 살펴보던 중 축사에서 소의 상태를 살피는 분이 계셔서 다가가 보았어요. 산업동물임상교육연수원장이신 수의학과 김단일 교수님이셨는데요. 산업동물임상교육연수원(이하 ‘연수원’)은 소, 돼지, 말, 가금류 등 산업동물의 진료를 실습하는 곳으로, 서울대학교 학생뿐 아니라 전국의 수의과대학 학생들이 찾는다고 합니다.
축사에서 소의 상태를 살피는 김단일 교수님
축사에서 소의 상태를 살피는 김단일 교수님
전국의 수의과대학 학생들이 평창캠퍼스를 찾는 이유

“수의과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반려동물, 소동물 수의사를 생각하고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큰 동물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유롭게 접하고, 만지고, 실습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부족해서 그런 부분도 있거든요. 대동물 수의사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못 하는 거죠. 그래서 경험하고 실습하는 기회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이곳 연수원이 생기게 됐어요.”

과거에는 병원 원장님들께서 인턴을 받아서 24시간 함께하며 도제식으로 대동물 수의사를 양성했다고 해요. 그런데 교육방식이 점차 체계화되면서 그 역할을 대신할 연수원의 임상 실습 과정이 필요해졌죠. 대동물 임상 실습을 할 수 있는 학교가 거의 없다 보니, 우리나라 10개 수의과대학 중 올해는 제주대를 제외한 9개 대학의 학생들이 모두 이곳에서 연수를 받는데요. 기본 교육은 2박 3일 또는 4박 5일 과정으로 열리고, 여름방학에는 선발 과정을 거쳐 2주간 심화 교육도 진행된다고 해요.
교육이 이루어지는 실습장
교육이 이루어지는 실습장
“우리에게 친숙한 강아지나 고양이도 진료를 위해서는 핸들링 방법을 배워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곳에서 실습하기 전까지 소를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 학생이 많아요. 수의과대학의 수업은 대부분 질병과 치료, 처치법에 관한 것이니 직접 경험하는 것이 필수적이죠. 진료 시 동물이 움직이지 않게 하는 기본적인 보정법부터 어디에 어떻게 주사를 놓아야 하는지, 혈액검사는 어떻게 하는지와 같은 것들을 실습하고 있어요.”

지역과 함께 살아가는 대동물 수의사의 삶

김 교수님은 지난 2012년 11월, 온 가족과 함께 평창으로 이사 왔어요. 캠퍼스 안에서 생활한 것으로는 아마도 1호일 것이라며 웃어 보이셨는데요. 학부 시절 2주간 경험한 대동물 실습에서 지역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 마음을 움직여 대동물 수의사를 선택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진료를 통해 건강을 회복하는 동물을 보는 것은 항상 기쁘고 보람찬 일이라고 말합니다.
입원동에서 치료 중인 송아지들
입원동에서 치료 중인 송아지들
“3~4년 전에 영월에서 6개월 된 송아지를 치료한 적이 있어요. 그동안 수많은 골절 케이스를 봤지만, 지금껏 그 친구처럼 심한 케이스를 본 적이 없어요. 뼈가 피부 밖으로 노출된 채로 시간이 경과된 상황이라 뼈도 일부 잘라내야 했고요. 우리나라는 아직 병원으로 소를 싣고 와서 진료를 보는 시스템이 안 잡혀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목장에 가서 진료하는데, 그 친구를 치료하느라 넉 달을 왔다 갔다 했어요. 가장 오랜 시간 치료한 케이스이기도 하고, 다 낫고서 건강한 소로 자라서 축주께서 고맙다고 연락을 주셨던 기억이 나네요.”

김 교수님은 강의와 교육, 진료뿐 아니라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신데요. 현재는 분만 전후 젖소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대사성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고, 최근까지는 국내 축산 ICT 장비를 이용한 소의 체온, 위의 활동성 데이터 관련 연구도 진행하셨다고 해요.
연구 내용을 설명하는 김단일 교수님
연구 내용을 설명하는 김단일 교수님
아무도 책임 지우지 않은 일을 지속하는 힘

연구실 한편에 걸려있던 달력에는 일정이 빼곡히 적혀있었는데요. 강의·실습 교육·진료·연구까지, 쉴 틈 없는 일상을 보내고 계신 가운데 어려움은 없으셨을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교육의 필요성에 관한 공감도가 높아지고, 임상 실습 문의가 꾸준히 있는 상황이라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만드는 것이 늘 고민이라는 말씀을 조심스럽게 꺼내셨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함께 하는 동료 모두 자부심을 품고 일하고 있어요. 그런데, 연수원이 교육기관으로서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병원이 같이 운영되어야 하거든요. 아픈 동물을 진료해야 케이스도 쌓이고, 수의학적 지식이 늘 수 있으니까요. 연수원에 대동물병원이 있긴 하지만, 교육이 있는 동안은 병원 기능이 멈춰요. 대동물의 특성상 실습 중에도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진료를 배우러 오는 대학원생을 포함해서 모든 인력이 교육에 투입되거든요. 그래서 교육이 이루어질 때 진료의 기능도 유지될 수 있을 만큼의 인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죠. 현실적인 어려움은 그런 부분인 것 같아요.”
산업동물임상교육연수원이 자리한 평창캠퍼스 291동
산업동물임상교육연수원이 자리한 평창캠퍼스 291동
평창군 전체에 대동물을 진료하는 개인병원이 한 곳이라, 바쁜 일정 사이에도 정기적으로 목장을 방문하고, 갑작스러운 의뢰가 들어오면 밤을 새워 진료하는 일도 있다고 하는데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대동물 연구와 교육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교수님과 대화를 나눌수록 일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느껴졌거든요.

“올해로 전임 교수가 된 지 10년 차가 됐더라고요. ‘그동안 어떻게 버티고 있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물론 저를 믿고 함께해 주는 동료들도 있고, 매 학기 열심히 실습에 참여하는 학생들도 있고, 치료받고 나아서 목장으로 돌아가는 동물들도 있지만, 원동력은 조금 다른 문제인 것 같더라고요. 사실 아무도 저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았거든요. 우리 학교 학생들 수업만 해도 되고, 연수 교육을 운영하지 않는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하고 묻는다면……. ‘묘한 사명감’ 때문인 것 같아요. ‘내가 안 하면 누가 하지?’ 하는 생각이요. 그게 원동력인 것 같습니다.”
축사를 정비하는 교수님(좌)과 연구실 책장에 모여있는 소 관련 물건들(우)
축사를 정비하는 교수님(좌)과 연구실 책장에 모여있는 소 관련 물건들(우)
교수님의 답변을 듣고 부리 끝이 찡해졌어요. 천직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평창에서의 생활이 힘든 점도 있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멋진 자연환경 속에서 생활하면서, 교육과 연구를 할 수 있어 좋다고 미소 지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님께서 그리는 연수원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전하며, 스누새는 다음 비행을 준비하러 갈게요!

“서울대 수의대가 아시아 최초로 미국수의사회(AVMA) 인증을 받았잖아요. 미국 수의대 졸업생과 동등한 자격이 주어지는 대단한 일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장기적으로 ‘우리 산업동물임상교육연수원이 아시아권 수의과대학 학생과 수의사들에게 교육적으로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있어요.”
답장 (5)
  • 나무발발이
    나무발발이
    제 삶과 관련 없는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스누새편지에서 읽고 함께 뭉클한 감정이 들어 댓글 남깁니다. 한 분야에 헌신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 왜 저희 삶의 위로가 되는 걸까요^^ 오늘도 따뜻하게 하루를 시작하며 멀리서나마 교수님의 바람과 문제에 동참합니다.
  • 마도요
    마도요
    참 교수님 참 교육자 참 연구자이신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열정과 노력 본받고 싶습니다~
  • 오목눈이
    오목눈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교수님 일을 다하시는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 거위
    거위
    평창 캠퍼스는 앞으로 제가 교육받을 곳이라는 점에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열정적으로 동물을 돌보시는 교수님의 열정을 본받고 싶습니다 :) 좋은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거위
    거위
    정말 말씀하셨듯이 사명감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대동물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고 주로 소비하는 입장이다보니 그 이야기를 잘 접하지 못했었던 것 같은데요. 멀리서나마 마음속으로나마 늘 멀리서 응원하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대동물 수의사에 대한 추가적인 소식 계속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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