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아홉 번째
15명의 총장님을 위하여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막 결혼한 젊은 가장은 아내와 떨어져 지내며 생계를 책임지려 1975년 상경했어요. ‘큰나무 덕은 못 봐도 큰사람 덕은 본다’ 말이 떠올라 서울대학교 총장 공관 근무를 지원했고, 그렇게 서울대와 43년의 인연을 시작했대요. 지금까지 서울대 총장 15명을 모신 총무과 윤경노 선생님을 만나 1월 말 퇴직을 앞둔 소회를 들어봤어요.
2022년 친절으뜸상 시상식에서 오세정 총장과 함께
2022년 친절으뜸상 시상식에서 오세정 총장과 함께
“진짜 떠나나 싶어요. 내 집보다 공관 생활이 많았는데 믿어지지 않네요. 아침마다 총장님께 인사드리고 시작되는 일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근무하니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모셨던 총장님들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쉬운 이별은 저에게도 오네요. 친절으뜸상 수상자로 화려한 퇴직을 만들어주신 오세정 총장님, 사모님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윤 선생님의 업무는 건물 내외 순찰, 시설물 관리, 행사 준비 등 관저에 관련된 모든 일이에요. 초반에는 격일제 근무였고, 관리자급이 되었을 때는 출퇴근 업무로, 현재는 다시 격일제 근무를 하고 있어요. ‘나 살기 위해 정성껏 근무했을 뿐’이라는 그는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으로 임했다고 하시네요.
공관 화단 관리 후
공관 화단 관리 후
“업무는 익숙해지면서 쉽게 처리할 수 있었어요. 군대의 동상 예방 수칙 중 ‘적절한 사지 운동은 혈액 순환을 돕는다’는 표어가 머리에 항상 있어, 잡초 뽑기, 유리 닦기, 쓰레질 등 뭘 하든 움직이면 건강해진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움직였어요. 아파 입원한 적도, 결근 한번 한 적 없어요.”

윤 선생님의 정갈한 양복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접견실은 그 어느 공간보다 제일 아끼는 장소라고 해요. “손님이 오시면 가장 먼저 들리는 곳이에요. 모든 것을 깨끗하게 준비해 두고 접견실을 돌아보며 하나하나 점검할 때, ‘다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며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오랜 근무 시간 동안 지켜온 선생님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어요
오랜 근무 시간 동안 지켜온 선생님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어요
오랜 시간 세계의 거물들이 오고 간 곳이라고 하기엔 아담하고 소박한 공간일 수도 있지만 그곳에는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켜온 선생님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어요.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물건이 없어지는 소동이 있었어요. 내부 근무자 중 한 명이 범인이었는데 당시 윤천주(제13대) 총장님은 ‘사람에게 원수를 만들지 말라’며 용서해 주시고 다른 부서로 발령 보냈죠.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지금까지 ‘내가 바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를 만들지 말고 참고 사는 것이 진짜 사람답게 사는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또 공관은 가정이잖아요. 저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상식적으로 가정의 일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직원이 올 때마다 ‘불필요한 얘기는 하지 말라’, ‘서로 의심하고 피해줄 수 있으니 귀중품 가지고 오지 말라’ 여태 이렇게 당부했어요.”
접견실에서
접견실에서
박봉식(제17대) 총장님 때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학생들이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며 관리실쪽으로 던진 큰 돌을 어깨에 맞았을 때도 아프다고 하면 총장님이 걱정하실까 봐 괜찮다고 했다고. 과묵하고 강직해 보이는 그의 표정처럼 웬만한 건 절대 얘기하지 않았다고 해요.

윤 선생님은 근무하면서 무엇보다 좋았던 것으로 따뜻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꼽았어요. 총장님과 비서실 근무팀, 사모님과 공관 근무자 팀으로 윷놀이 대결도 하고 다 같이 떡국도 먹었던 정월에는 행복한 마음이 벅차올라 ‘이런 삶도 있구나’는 생각도 들었다고 하시네요.

“김종운 총장 사모님께서는 당시 근무자들에게 퇴직해 화물트럭을 운전할 수 있으면 장사도 할 수 있다고, 면허를 따도록 배려해 주시고, 첫차 샀을 때는 고사도 지내주셨어요. 인정이 넘치셨죠. 직장이 아니라 가족 같은 분위기였어요. 다시 한번 공관에서 근무하기를 잘했구나, 충실히 근무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됐죠.”
왼쪽 사진_제24대 이장무 총장님(오른쪽 두 번째)과 윤경노 선생님(맨 오른쪽), 오른쪽 사진_제23대 정운찬 총장님(가운데)과 윤경노 선생님(맨 왼쪽)
왼쪽 사진_제24대 이장무 총장님(오른쪽 두 번째)과 윤경노 선생님(맨 오른쪽), 오른쪽 사진_제23대 정운찬 총장님(가운데)과 윤경노 선생님(맨 왼쪽)
이현재(제16대) 총장님부터 이기준(제22대) 총장님 재임까지는 구 공관 옆 300평 되는 테니스장 예정지에 배추와 각종 야채를 심어 직원들과 나눠먹고, 수확한 배추로 사모님과 직원들 같이 김장도 했다고 해요.

근무하는 동안 특별했던 경험은 유명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을 많이 뵀다는 것이래요. “제일 기억에 남는 분은 반기문 전 UN사무총장님이에요. 우리나라에서도 세계 대통령이 나올 수 있구나는 자부심도 생기고,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됐구나’ 이런 흐뭇한 마음에 너무 기뻤어요. 자유를 위해 투쟁하신 아웅산 수지 전 미얀마 국가고문도 유심히 봤고, 박찬호 선수와는 사인을 받고 사진까지 찍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평생 만나 뵙기 힘든 분들을 근무하며 뵐 수 있어 참 좋았어요.”

43년 동안 근무하기 싫다는 생각 한 번 든 적 없었다는 윤 선생님을 뵈니 성실함이 튼튼히 자리하는 곳에는 평온이 깃든다는 말이 실감 났어요. 보람도 느끼고, 배울 것도 많았다며 좋은 점만 골라 얘기하다 결국 근무하는 동안의 모든 것이 좋았다는 윤경노 선생님. 고향에 잔뜩 심어놓으신 나무 열매 먹으러 꼭 오라던 선생님의 애정 어린 당부대로 날아가 인사드릴게요. 서울대에서의 추억을 갖고 선생님도 더욱 평온하시길 스누새가 응원합니다!
답장 (9)
  • 제비
    제비
    잘봤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 꿩
    아침부터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건강하세요 선생님!
  • 매
    언제나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 덕에, 학교가 온전히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닭
    원수를 만들지 말라는 말이 인상깊네요. 앞으로의 길도 응원합니다!
  • 느시
    느시
    참으로 대단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나무.. 사람... 모두 구구절절 가슴에 박힙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 양진이
    양진이
    성실함이 깃든 곳에 평온함이 온다는 말씀이 딱인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수고많으셨고 감사드립니다!
  • 부엉이
    부엉이
    건강 하세요 수고많으셨습니다.
  • 두견
    두견
    공관 옆을 지날 때마다 저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묵묵히 일해 오신 공간이라니 다르게 보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 새홀리기
    새홀리기
    그간 스누새 편지를 열심히 읽어왔지만, 오늘처럼 감동을 주는 글은 처음이네요. 그간 교내의 교수/학생들만 만났지, 직원분들 생각은 못했었는데 이 글 덕에 그분들 생각을 할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사람에게 원수를 만들지 마라'라는 말도 참 감동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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