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경단녀' 박사 이야기
스누새가 보면 서울대에서 제일 바쁜 사람은 어린 아이를 키우면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 같아요. 엿듣자 하니 지쳐서 사라져 버리는 "엄마 학생"들도 많다고 해요. 당당하게 돌아와 박사학위를 받은 분을 스누새가 만나고 왔어요.

“네가 포기할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모른다.”
일곱 살 아이를 둔 황희승 씨가 박사 논문 디펜스를 마쳤을 때 선생님들은 그제야 속마음을 털어 놓았습니다. 출산과 함께 실험실에서 사라졌던 박사수료생이 3년간 아이만 키우다 돌아와 다시 연구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그 어려운 일”을 그녀가 해 낼 수 있을지 모두가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쉬었던 기간을 제하면 빨리 마친 편이구요.”
고집스레 걸어 온 연구자의 길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여자는 문과가라"는 괜한 반대에도 이과를 선택했고, "여자는 약대가 최고"라는 권고를 무시하고 자연대에 진학했고, 졸업하고 “여학생은 취직하고 시집가라”는 압박을 이기고 전공이 좋아 대학원 석박사통합과정에 진학했습니다. 박사수료까지 한 달음에 달리고 나니 이제 그런 딴지는 사라진 듯 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녀는 딱 3년만 세상에 져 주기로 했습니다. 남학생들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듯, 그녀 또한 육아복무를 마치고 돌아오기로 스스로에게 약속했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다네요. ‘사라진 여학생’들이 너무 많으니까, 저도 그럴 거라고들 생각했데요.”
실험실
그녀의 청춘을 가져간 '계통분류및 분자진화학' 연구실은 순수학문을 지킬 수 있는 최고의 연구중심대학에서만 가능한 공간입니다.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선배가 되어 버린 후배들, 따라잡지 못한 최신 연구들, 그리고 미친 듯이 바쁜 ‘리서치 맘’ 생활이었습니다. 전업 맘처럼 아이에게 쓸 시간이 많지도 않고, 여느 워킹 맘처럼 금전적 여유가 되는 것도 아니어서 연구하는 엄마는 서글픔이 두 배인 것 같습니다.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아이는 논문에 정신이 팔려 있는 엄마에게 시위라도 하듯 중요한 시기마다 격리를 요하는 병을 앓았습니다. '아이가 아프다'고 하면 '얼른 들어가라'는 답을 바로 들었지만 돌아서는 뒤통수가 찜찜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날이면 “이렇게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스트레스만 많은 건 정상이 아니야!” 하고 외치며 연구를 포기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독한 과학자’ 한번 해 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아이 걱정, 끼니 걱정 안 하고 그냥 아침부터 밤까지 연구만 집중하고 사는 거요.” 그런 달콤한 고독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계속 출근을 하고, 논문을 쓰고, 프로젝트를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박사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갯가재
황 박사 눈에만 예쁜 ‘갯가재’는 지구의 자연환경 변화에 적응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중요한 생물입니다.
“예쁘죠? 귀엽죠?”
“....”
“현미경에 두고 보면 더 예쁜데.”
“....”
황 박사는 스누새에게 아들 사진을 보여줄 때처럼 환하게 웃으며 ‘락앤락’을 열어 갯가재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갯가재의 변화를 관찰하고 종 분화를 연구하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연구자입니다.

생명과학이라고 하면 DNA나 뇌과학 같은 분자생물학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그녀는 생물을 연구하는 계통분류학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생물들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어서, 과학자들은 그 변화를 추적하고 종을 새롭게 분류하고 계통을 정리해 주어야 합니다. 생물의 종 다양성 보존이라는 과학의 책무를 수행하는 긴 전통의 대열에 서 있는 것은 그녀의 자부심입니다.
갯가재
표본을 채취하러 간 황희승 박사와 동료들. 실험실 사람들은 모두 연구를 위해 스쿠버 다이빙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현장에서 표본을 생포해야 하는 계통분류학의 특성상 황 박사는 자주 바다에 나갑니다. 갑각류를 연구하는 동료들도 스쿠버 다이빙 장비로 무장하고 각자의 새우와 조개와 게를 찾아 심해로 들어갑니다. 바다에서 자칫 호흡이 흩어지면 두고 온 아들 걱정 사이로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곤 합니다.

바다 밑에서 그녀가 세운 가설대로 난류에 떠밀려 새로운 갯가재 종이 생겨난 것을 보았습니다. 색다르게 진화한 갯가재는 꼬리에 가시가 많아서 "가시꼬리갯가재"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생물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계통분류학자의 특권입니다. 그녀가 이름 붙인 갯가재가 이미 10종,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아이들도 더 있습니다.

"엄마로 살면 제 이름이 없어지잖아요. 그런데 이 아이들은 내가 주는 이름으로 불려요." 황희승 씨에게 연구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갯가재
함께 고생해 준 아들과 함께 8월 29일에 박사학위를 받은 황희승씨
박사 논문 수정을 마무리 하던 날은 마음 같아선 목욕재계라도 하고 경건한 아침을 맞고 싶었지만, 그 날이 아이의 소풍이라 새벽부터 야채를 볶고 시금치를 삶으며 부산하게 시작했습니다. “아이 키우는 데 효율적인 방법은 없는 거 같아요.” 육아 7년차에 깨달은 것은 시간과 진심과 노동을 쏟아 내지 않고는 아이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워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연구도 마찬가진 거 같아요. 열심히 하면 더 좋아지는 거지 쉬워지는 건 없더라구요.”

“절대 포기하지 마라.” 수정을 마친 논문에 심사위원의 서명을 받기 위해 찾아갔을 때, 따뜻한 축하를 건내던 교수님이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강하게 한 마디를 던집니다. 새로 시작하는 포닥생활과 사범대 강의, 곧 초등학교에 가는 아들 때문에 “미친 듯 바쁜” 리서치 맘의 생활은 계속 되겠지만 황희승 씨는 포기하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답장 (2)
  • 할미새사촌
    할미새사촌
    감동적이다 나도 대학원가려 하는데 용기가 많이 됐어!! 땡큐 스누새
  • 양진이
    양진이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 저 또한 삶의 의지를 얻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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