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예비엄마의 빛나는 졸업장
서른여덟 살 박민선 씨는 내일이면 박사가 되고, 두 달 뒤에는 엄마가 됩니다. 박사과정에 처음 등록한 것이 2009년이니 만 10년 만의 졸업입니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 것 같아요." 예비엄마는 긴 박사생활을 후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칼박사’를 받았더라면 지금쯤 더 방황하고 있을 것 같거든요.”
졸업식
8월 29일 오전에는 후기 학위수여식이 열립니다. (사진은 2019년 전기 학위수여식)
청년시절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행운아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때 행복하더라 해서 심리학과로 진학했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을 때 진짜 행복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행복을 정의하고 나니 행운도 따라왔습니다. 많은 정보 없이 진학한 석사과정에서 "통계의 대가"를 지도교수로 만나 양적연구에 재미를 붙였고, 통계방법론 강의를 나갈 만큼 체득이 되고 나니 세상은 연구주제로 가득해 보였습니다. 비행 청소년들의 트라우마 시작 연령과 범죄 반복 횟수 간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값이 딱 떨어지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석사논문은 통과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박민선
아태보건학회에서 사회적 건강지수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할 때. 학회에 가면 항상 기분 좋게 설렙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은 게 두 번째 행운인 거 같아요.”
박사 수료까지 남들보다 빠르게 달려낸 짧고 굵은 여정은 이후 긴 방황으로 이어졌습니다. 가출 청소년 논문을 쓰기 전이나 다음이나 그들의 현실에는 아무 변화도 없고,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들을 주제로 또 다른 논문을 준비하는지, 답을 알 수 없었습니다.

현장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구치소로 찾아가 보호감찰 중인 청소년들을 만나고 가출한 학생들을 상담하면서 숱하게 상처받고 이용도 당했습니다. 숫자로 그들을 기만하고 싶지 않아서 질적연구를 새로 배워서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잘빠진 논문 하나 쓰면 될 걸 뭘 이렇게 돌아서 가느냐고 주변에서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 길을 다 돌았기에 "나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결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예민한 그녀가 몇 달치 고민을 가져가면 단칼에 답을 내려 주시는 명쾌한 지도교수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민선
쉼터 청소년들을 상담하던 때. 잠시 논문을 접어 두고 현장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결국 왜 공부하는 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얻지 못했을 거에요.
세 번째 행운은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공공기관에서 박사논문 주제를 찾은 것입니다. 국민건강보험의 빅데이터에 연결된 정보를 분석하는 일을 했는데, 개인의 건강 정보를 활용해 사회적 건강을 연구할 수 있는 데이터의 보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신나게 쓴 프로포절이 통과되고 팔을 걷어붙이던 그 때, 임신을 확인했습니다.
"임신한 걸 알고 한 달 동안 잠을 못 잤어요. 논문을 쓸 수 있을까. 영원히 졸업을 못 하면 어떡하지."
실은 오래 전에 난임 판정을 받고 일단 학위부터 끝내면 치료를 받으리라 결심했는데 이런 일은 사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인가봅니다.

서울대의 엄마 대학원생 동아리인 ‘맘인스누’를 통해 지인들의 소식을 듣습니다. 누가 논문 학기에 아이를 유산했다는 이야기, 누가 아이 때문에 논문 아이디어를 날려버렸다는 이야기가 매년 장소만 바뀌어 재생산되는 도시괴담처럼 들려왔습니다.

내 논문을 구상하고 쓰는 것도 나만 할 수 있는 일인데, 뱃속의 아기를 보호하는 것도 내 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가장 열심히 공부할 시기에 가장 치열하게 쉬어야 하는 역설이 찾아왔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외로움이 불쑥 불쑥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외롭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지인들에게는 더 할 수 없어 남편에게만 하다가, 마침내는 스스로에게 카톡을 보내는 걸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한 문장 쓰고 못 쓰고 있어”, “완전 잘못 쓰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 자신에게 카톡을 보내면 '1'이 금방 사라져서 속이 시원했습니다. 긴 논문 노동자 생활에서 셀프 카톡은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박민선
출근하고 있는 공동 연구실 모습. 이렇게 하고 싶은 연구만 계속할 수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찾아드는 공간입니다.
얼마 전부터 출근하고 있는 재단에는 비슷한 분야로 연구하는 동료들이 많아서 공동연구의 진수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연구만 계속할 수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창가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환하게 찾아옵니다.

8월 29일은 후기 학위수여식이 열리는 날입니다. 2011년부터는 여름에도 체육관에서 전체 학위수여식을 합니다. 공식행사는 ‘쿨하게’ 건너뛰고 사진촬영으로 대신하는 졸업생들도 있는 것 같지만, 박민선 씨는 잘 버텨준 아기와 함께 빛나는 졸업장을 받을 예정입니다.
졸업을 축하합니다
답장 (1)
  • 양진이
    양진이
    같은 여성으로서 대단하십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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