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두 번째
샤샤샤, 정문 탄생기
우리 학교의 대표 상징물인 ‘샤’ 정문. ‘샤’의 아랫부분은 차량이 다니던 길이었는데요. 최근 보행자가 다닐 수 있도록 정문 주변을 광장화했어요. 이제 정문 바로 옆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사진도 찍고, 정문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됐어요.

문득 스누새는 광장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샤 정문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해졌어요. 제야의 종으로 유명한 보신각 종을 조각하신 미술대학 강찬균 명예교수님(디자인학부 공예과 금속공예 전공)을 만나 정문 탄생기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어요.
강찬균 명예교수님 작업실에서
강찬균 명예교수님 작업실에서
“당시 미대 김세중 학장님은 정문 조성 의지가 강했어요. 1976년 겨울 조교수였던 저를 불러 정문 설계 시안을 준비해 보라고 하셨죠. 1977년 3월 개강하자마자 본부, 미대, 공대 3개의 후보 시안을 선정해 학장 회의를 개최했지만 결정이 어려워 미대, 공대, 환경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등 9명의 위원을 위촉하고 전문위원회를 꾸렸어요.”

1975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단과대학을 모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를 조성했지만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정문은 없었대요. 캠퍼스를 대표하는 정문의 필요성과 디자인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고, 1976년 4천만 원의 국회예산이 통과되면서 본격적인 정문 조성 프로젝트가 시작된 거예요.
(왼쪽)강찬균 교수는 투시도 대신 직접 찍은 학교 출입구 사진에 ‘샤’를 그려 제출했다. 금속 모형 제작 당시 강 교수 모습, 사진 앞쪽에 ‘샤’가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강찬균 교수 제공
(왼쪽)강찬균 교수는 투시도 대신 직접 찍은 학교 출입구 사진에 ‘샤’를 그려 제출했다. 금속 모형 제작 당시 강 교수 모습, 사진 앞쪽에 ‘샤’가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강찬균 교수 제공
전문위원회 1차 회의에서는 먼저 정문 건립에 대한 원칙을 세웠대요. 첫째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룰 것, 둘째 상징적일 것, 셋째 서울대인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할 것, 넷째 개방적이며 형태는 미닫이식일 것이라는 내용이었어요.

“1차 회의 후 9명의 위원 중 제일 막내였던 저에게 추가 시안을 만들라고 했어요. 10일 뒤 개최된 2차 회의에 2개의 새로운 시안과 함께 펜으로 이런저런 안을 그렸던 스케치북을 들고 갔죠. 정식으로 제출한 2개의 시안에 대해서는 나머지 위원들의 반응이 시큰둥했어요. 그러다 스케치북에 그려 뒀던 ‘샤’ 형태의 디자인을 발견한 위원들이 ‘어’ 하더니 손가락으로 허공에 그려보더라고요. ‘이거’라며 ‘샤’를 교문 형태로 구상해 보자고 결정하고 저에게 정식 도면을 요청했어요.”
스크랩해 둔 정문 자료를 설명해 주는 강찬균 교수. 1977년 설계도 대신 1/20로 축소된 금속 모형을 직접 제작했다.
스크랩해 둔 정문 자료를 설명해 주는 강찬균 교수. 1977년 설계도 대신 1/20로 축소된 금속 모형을 직접 제작했다.
강 교수님은 보이스카우트에서 ‘ㅅ(시옷)’으로 엇갈리게 말뚝을 박아 천막치던 것에 착안해, 서울대 배지 안의 ‘샤’를 보고 스케치했었다고 그 당시를 떠올리셨어요.

그래픽 작가였던 강 교수님은 작도 렌더링 대신 직접 찍은 학교 입구 사진에 투시도를 그리고, 설계도 대신 1/20로 축소된 금속 모형을 제작했어요. 더 쉽고 빠르게 소통할 수 있었던 방법이었던 거죠. 3차 회의에서 이를 직접 본 위원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샤’안을 만장일치로 확정했대요.
‘ㅅ’으로 말뚝 박은 모습에 착안해 스케치했다고 설명해 주는 강찬균 교수
‘ㅅ’으로 말뚝 박은 모습에 착안해 스케치했다고 설명해 주는 강찬균 교수
“금속 모형을 제작해 간 덕분에 설계팀에서 렌더링하는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었죠. 하지만 바로 제작을 시작할 수 없었어요. 1977년 11월 완공이 목표였는데 46톤의 철근 재료값 밖에 안되는 공사 금액 때문에 2번 연속 유찰됐어요. 당시 시설국장의 결단으로 공과대학 공사 중인 건설 업체에 정문 제작을 발주했고 다음해인 1978년에 완공했어요.”

완공된 후 새 정문에 대한 구성원의 의견은 다양했대요. “사실 무슨 철골이냐며 짓다만 공장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죠. 지금은 파리의 대표 명물인 에펠탑도 처음에는 흉물스럽다고 했어요. 결국 정문 색상도 점잖은 브라운 계통의 세피아 색상으로 결정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인주와 비슷한 광명단(주홍색)으로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너무 튀기도 하고, 당시에는 정치적인 느낌 때문에 할 수 없었어요.”
1978년 정문 모습. 세피아색으로 도색하고 아래 미닫이문이 있다. 사진 강찬균 교수 제공
1978년 정문 모습. 세피아색으로 도색하고 아래 미닫이문이 있다. 사진 강찬균 교수 제공
강 교수님은 정문 조성에 대한 결정 후, 사안들이 바로바로 결정되며 바쁘게 돌아갔기 때문에 여론이라는 건 생각도 못하셨다고 해요. “저는 정문 완공 직후 바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어요. 미대에 새로 개설되는 금속 공예 전공 때문이었죠. 그래서 구성원의 반응도 잘 몰랐어요. 김세중 학장님은 부정적인 여론에서 저를 보호하려고 위원회에서 모든 걸 결정하고 전 다듬기만 했다고 얘기해 주셨던 것 같아요.”

젊은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당시 ‘정장(샤)이 아닌 다른 창의적인 작품으로 정문을 디자인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아쉬움도 있으셨대요. 그러나 지금은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학교 구성원이 자부심도 느낄 수 있는 정문이라 만족스럽다고 하시네요. 오랜만에 학교에 들러 새 정문도 보시고, 광장 조성에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도 전하시고 싶다고 하셨어요.
2022년 새롭게 조성된 정문 광장
2022년 새롭게 조성된 정문 광장
또한 정문을 제작한 작가로서의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어요. “정문을 광장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더 가까이서 즐길 수 있어서 좋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만큼 서울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정문을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40여년 전, 온전한 종합대학을 만들기 위한 바람을 담아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정문. 이제 더 열린 캠퍼스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광장이 됐어요. 사람들에게 가까워진 만큼,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서울대학교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길 기대해 봅니다.
답장 (11)
  • 매
    정문광장으로 서울대 얼굴이 한층 밝아졌어요
  • 메추라기
    메추라기
    어제 하교하면서 사람들이 즐겁게, 또 안전하게 정문에 모여있는 것을 보면서 함께 기분이 좋아졌어요~
  • 느시
    느시
    졸업사진을 찍을 때 훨씬 더 안전하고 예쁜 장소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에요
  • 아비
    아비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다니!!멋있어요
  • 발구지
    발구지
    이런 역사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얼른 리뉴얼된 샤 앞에서 사진찍고 싶어요!
  • 꾀꼬리
    꾀꼬리
    매번 낙성대역으로만 학교에 들어가다보니 이번에 새롭게 조성된 정문을 아직도 못 봤네요. 시간 내서 정문 보러 가야겠어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 비둘기
    비둘기
    미닫이문이 있었다는 게 신기해요!
  • 발구지
    발구지
    서울대하면 딱 떠오르는 샤 정문! 비하인드를 알게되니 재밌네요~
  • 논병아리
    논병아리
    지나가면서 한번쯤은 언제, 누가 만들었을까 궁금했었는데 덕분에 재밌는 글 읽고 갑니다!
  • 종다리
    종다리
    전면 대면 수업 학기의 개강과 새로워진 정문으로 요즘 정말 학교 다닐 맛 납니다!!ㅎㅎ
  • 제비
    제비
    우와 이런 역사가 있었다니 ㅎㅎ 얼른 저도 정문앞에서 학사모 날리고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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