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아시나요? 한국에 유학 온 재일동포들이 사실은 북한 간첩이었다는 충격적인 이 사건은 공안 정권이 북한과의 체제경쟁과 민주화의 열망을 억압하기 위해 고문과 조작으로 만든 것이었어요. 이 사건의 피해자 중에는 우리 학교로 유학을 왔던 동포들도 있었어요.
“1960년대 일본은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 멸시가 매우 심각했어요. 그런 차별에서 크다 보니 내가 왜 그런 부당한 처우를 받아야 하는지, 재일동포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커진 조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모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나의 뿌리’가 궁금해 대한민국 땅을 밟고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했던 스무 살 청년 강종헌에게 그런 비극이 찾아올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1975년 11월, 보안사령부 수사관들은 종로구 하숙집에서 그를 강제로 연행해 두 달 동안 고문했어요.
“한국 사정에 어둡고 기반도 없는 재일동포들이 정보기관에서 볼 때 가장 다루기 쉬웠겠죠.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하게 되고 나를 친구로 사귄 것 말고는 아무 죄가 없던 동료들도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평범한 재일동포 유학생이던 저는 그렇게 북한의 거물급 간첩이 되어있었습니다.”
“1960년대 일본은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 멸시가 매우 심각했어요. 그런 차별에서 크다 보니 내가 왜 그런 부당한 처우를 받아야 하는지, 재일동포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커진 조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모국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나의 뿌리’가 궁금해 대한민국 땅을 밟고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했던 스무 살 청년 강종헌에게 그런 비극이 찾아올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어요. 1975년 11월, 보안사령부 수사관들은 종로구 하숙집에서 그를 강제로 연행해 두 달 동안 고문했어요.
“한국 사정에 어둡고 기반도 없는 재일동포들이 정보기관에서 볼 때 가장 다루기 쉬웠겠죠.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하게 되고 나를 친구로 사귄 것 말고는 아무 죄가 없던 동료들도 옥고를 치렀습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평범한 재일동포 유학생이던 저는 그렇게 북한의 거물급 간첩이 되어있었습니다.”
공안 당국에 강제연행되기 4개월 전 의대 앞에서. 강종헌 선생님은 당시 만 24살의 평범한 의학도였어요.
강종헌은 보안사의 수사 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를 받은 사실에 대하여 “보안사령부 공작처에서 체포된 이래 서울 구치소로 이송되기까지 무려 50일간, 온갖 고문과 갖은 협박, 기만 밑에서 수사를 받았다.” … 2심 이후 취조당시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담뱃불로 지지고, 약도 먹였다. 또 뭔지 모르지만 몽롱해지는 주사를 맞았다’고 고문사실을 폭로했다.
-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중
고문을 당하며 수사관이 제시한 모든 혐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던 선생님은 이듬해 7월, 김일성을 찬양하고 국가의 기밀을 빼내 보고하는 간첩이 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어요.
“사형을 구형하는 검사의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피고인 같은 간첩은 생존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청운의 뜻을 펴보려고 찾아온 조국에서 목숨을 내놓으라니 참 서글펐습니다. 구치소에서도 제가 사형수라고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더군요. 혹시 비관해서 자살할까 봐, 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랍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사람 생명을 가지고 이렇게 못된 장난을 치는 권력에 절대 굴복해선 안 된다고. 그렇게 6년을 사형수로, 24시간 수갑을 차고 살았으니 인간이 아닌 짐승의 세월을 산 것이죠.”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교도소에서도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일본에서의 구명 운동에 희망을 걸며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버틸 힘이 되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국의 존재였다고 해요.
“내가 만약 다른 일로 일본에서 수감됐다면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조국의 감옥이니까 하루하루 수감생활에도 나름의 의의를 느꼈습니다. 감옥에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에게서,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도 버릴 줄 아는 젊은이들에게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봤습니다.”
“사형을 구형하는 검사의 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피고인 같은 간첩은 생존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청운의 뜻을 펴보려고 찾아온 조국에서 목숨을 내놓으라니 참 서글펐습니다. 구치소에서도 제가 사형수라고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더군요. 혹시 비관해서 자살할까 봐, 제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랍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사람 생명을 가지고 이렇게 못된 장난을 치는 권력에 절대 굴복해선 안 된다고. 그렇게 6년을 사형수로, 24시간 수갑을 차고 살았으니 인간이 아닌 짐승의 세월을 산 것이죠.”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교도소에서도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일본에서의 구명 운동에 희망을 걸며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버틸 힘이 되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국의 존재였다고 해요.
“내가 만약 다른 일로 일본에서 수감됐다면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조국의 감옥이니까 하루하루 수감생활에도 나름의 의의를 느꼈습니다. 감옥에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에게서,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기득권도 버릴 줄 아는 젊은이들에게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봤습니다.”
1988년 석방 후 환영행사에서 발언하는 강종헌선생님
선생님은 무기징역, 20년형 등 수차례의 감형을 거쳐 13년 후 자유의 몸이 되었어요. 정권이 바뀌며 국가가 나서 잘못된 과거사를 조사하고 반성했고, 2013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며 그제야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어요.
서울대학교는 억울한 수감생활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의학과 72학번 강종헌 선생님과 73학번 허경조, 영어영문학과 74학번 박영식, 사회계열 74학번 故 김승효, 77학번 김정사 선생님에게 지난 8월 학위수여식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어요. 40여 년 만에 손에 쥔 대학 졸업장은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재심으로 무죄를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법적 차원의 판결이에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재일동포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글도 적지 않죠. 그런 면에서 이 졸업장은 우리가 진정한 명예 회복을 받게 될 중요한 계기입니다. 이제 법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무죄가 입증된 셈이니까요.”
서울대학교는 억울한 수감생활로 학업을 마치지 못한 의학과 72학번 강종헌 선생님과 73학번 허경조, 영어영문학과 74학번 박영식, 사회계열 74학번 故 김승효, 77학번 김정사 선생님에게 지난 8월 학위수여식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어요. 40여 년 만에 손에 쥔 대학 졸업장은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재심으로 무죄를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법적 차원의 판결이에요. 아직 우리 사회에서 재일동포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글도 적지 않죠. 그런 면에서 이 졸업장은 우리가 진정한 명예 회복을 받게 될 중요한 계기입니다. 이제 법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에서도 무죄가 입증된 셈이니까요.”
서울대학교 명예졸업증서를 든 강종헌 선생님(왼쪽)과 박영식 선생님(오른쪽)
명예졸업증서를 든 허경조(왼쪽), 김정사 선생님(가운데)과 故김승효 선생님을 대신한 형 김승홍 님(오른쪽)
이번에 명예졸업증서를 받은 5명의 선배 중 간첩조작 피해자로 아픈 기억을 꺼내 증언한 사회계열 74학번 김승효 선생님에게는 졸업장을 직접 전달할 수 없었어요. 선생님은 조사과정에서의 고문·구타와 수감생활의 충격으로 몸과 마음의 병을 앓다 지난해 겨울 숨을 거두셨어요.
매년 수천 명이 손에 쥐는 서울대학교 졸업장. 그렇기에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스누새는 재일동포 선생님들에게서 서울대 졸업장의 의미를 새로이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많이 늦었지만 선생님들의 졸업을 축하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스스로를 바꿔 갈 수 있는 수완 좋은 사람들은 돈도 잘 벌고 출세도 할 겁니다. 반면 소수지만 시대에 순응하기보다 자신의 이상에 맞게 모순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는 후자의 땀과 눈물로 개척해온 것이 아닐까요? 서울대 후배들이 사서 고생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도리와 양심을 간직해 때로는 우직하게 살아갈 용기를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매년 수천 명이 손에 쥐는 서울대학교 졸업장. 그렇기에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스누새는 재일동포 선생님들에게서 서울대 졸업장의 의미를 새로이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많이 늦었지만 선생님들의 졸업을 축하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스스로를 바꿔 갈 수 있는 수완 좋은 사람들은 돈도 잘 벌고 출세도 할 겁니다. 반면 소수지만 시대에 순응하기보다 자신의 이상에 맞게 모순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는 후자의 땀과 눈물로 개척해온 것이 아닐까요? 서울대 후배들이 사서 고생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도리와 양심을 간직해 때로는 우직하게 살아갈 용기를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명예졸업장을 받은 후 74학번 박영식 선생님이 학교로 보낸 편지